클래식

Dvorak(드보르작) - Sympony No 9(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2악장"

black silk 2012. 12. 23. 00:21

 

 

 

 

 

 

 

 

 

Dvorak(드보르작) - Sympony No 9  Symphony No. 9  Op95. in E Minor  Movement Ⅱ(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2악장) (13 : 04)
 
 
 
드보르자크  Dvorak, Antonin(1841.9.8~1904.5.1) 체코      

 1.드보르작의 생애
 중부 유럽의 동쪽에 위치한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부터 북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몰다우강 기슭에 호젓이 자리잡은 네라호제베스라는 작은 마을에 수육점과 여관업을 겸업하는 집안에서 지금부터 150여년 전인 1841년 9월 8일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이 태어났다. 말이 수육점과 여관업이지 워낙 소규모로 운영하는 장사인데다가 드보르작 이후 연달아 8형제가 태어나서 대식구가 되자 드보르작의 형제들은 기아에 가까우리만큼 헐벗고 굶주림 속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가난했지만 울창한 원시림을 벗삼아 자연 속에서, 소박한 풍습과 체코 특유의 민요를 접하며 성장한 드보르작은 집시들이 즐겨 다루던 바이올린을 취미로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 입학과 동시에 선생님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드보르작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의 집을 들려가던 길손들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받던 드보르작의 바이올린 솜씨는 동네의 자랑거리가 되어 마을의 축제나 경사가 있을 때면 으례히 연주를 하곤 하였다.
 드보르작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챈 그의 삼촌은 드보르작을 오르간 연주가인 안토닌 리만에게 소개하여 리만밑에서 피아노와 오르간 그리고 기초 음악 이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드보르작의, 음악가로서의 생애가 시작되는 것은 그의 나이 열 여섯살 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진학하면서 부터이다. 바이올린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으로 2년 간의 학업을 마친 드보르작은 사설 관현악단의 비올라 주자로 취직을 했지만 봉급이 워낙 적어 계속되는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이처럼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작곡을 향한 마음은 활화산처럼 타고 있었고 더욱이 체코의 선구자적인 작곡가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가 지휘대에서 그의 자작 오페라 「팔려간 신부」를 지휘할 때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던 드보르작은 충격적인 자극을 받아 작곡에로의 집념은 날로 더해 갔다.
 1862년 프라하의 국민극장 소속 관현악단이 발족되자 드보르작도 이 가극장 소속의 관현악단 멤버가 되어 1871년까지 10여년간을 전속단원으로 근무하며 작곡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30세가 되어 비올라 주자직을 그만두고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는 한편 개인교수를 하며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교회에서의 고정급여가 생기며 생활사정도 조금 나아지게 되자 1873년 드보르작은 마음 착한 알토 가수인 안나 케르마코바(Anna Cermakova)를 만나 결혼한다. 또한 이 해는 그에게 있어서는 잊지 못할 시기로 행복한 결혼과 함께 오랫동안 동경하여 왔던 작곡계에 데뷔한 해이기도 하다.
 드보르작의 첫 데뷔작으로 할레크의 애국적 시에 의한 혼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찬가 「빌라 호라의 후계자들/Dedicove Bile Hory」을 발표하여 신진 작곡가로서 성공을 거둔다. 또한 스메타나의 지휘로 교향곡 NO.3 Eb장조 op.10의 초연으로 연이은 성공을 거두지만 가정적으로는 아직도 가난의 연속이었고 결혼 후 연년생으로 얻은 1남 2녀의 자식들을 차례로 잃고 비탄에 빠지게 된다. 드보르작은 자식을 잃은 슬픔 가운데서도 교회음악「스타바트마테르/Stabat Mater」op.58의 완성을 본다
 가난에 쪼들리던 드보르작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주어지는 ‘젊고 재능있는 그러나 가난한 예술가’에게 주는 국가연금을 받기 위해 작품을 출품한 것이 당선되어 연금 혜택과 더불어 국제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을 심사한 심사위원 중에는 ‘고전적 음악미학’의 저자로 유명한 한스릭을 위시해 브람스같은 대 작곡가들도 있었는데 브람스는 드보르작이 해마다 연금 신청을 위해 보내오는 그의 작품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장학금을 주는 것만으로 만족치 않고 자기의 작품을 출판해 주는 베를린의 유명한 출판업자인 짐로크에게 소개해 주기까지 한다. 이를 계기로 두 작곡가의 형제와도 같은 교우가 시작된다. 짐로크는 드보르작의 「모라바 2중창곡/Moravian Duets」op.20과 여덟 편의 소품으로 된 슬라브 춤곡집 제1집 등을 세상에 소개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드보르작의 세계적 명성은 그의 개인의 영광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외딴 곳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는 체코의 문화를 빛나게 하는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그의 명성이 더해가면서 그의 소질을 음악의 신동 모짜르트나 가곡의 왕 슈베르트에게 비유하는 평론가들까지 있었다. 샘솟는 상상력과 풍부한 정서를 갖고 있고 인위적인 기교도 부리지 않는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간직한 작곡가라는 평을 받는 드보르작의 음악은 세계 음악계의 이목을 체코로 돌리기에 충분하였다.
 헨델, 하이든, 멘델스존 같은 위대한 음악가에게만 갈채를 보냈던 영국까지도 드보르작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이렇게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자 1882년 국가 장학금의 음악고문인 한슬릭으로부터 빈으로 돌아와 독일 오페라를 쓰도록 권유받는가 하면 2년 후인 1884년에도 빈 궁정 오페라의 총감독인 호프만 남작으로부터 비슷한 의뢰를 받지만 이를 모두 거절하고 빈과 독일을 떠나 고국 체코에 머무르며 자연과 더불어 작곡에만 전념한다. 이때 국민주의적 색채가 짙은 애국적 내용의 서곡 「후스교도/Husitska」op.67과 교향곡 제7번 d단조를 작곡한다.
 드보르작이 영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84년이다. 오라토리오 「스타바트마테르」op.58이 연주되었을 때,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국에 전했다. “청중은 내가 나타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로 맞이해 주었다. 더 큰 열광은 곡이 진행됨에 따라서 더욱 커져서 마지막 박수는 너무 크게 울려 나는 청중에게 몇번이고 답례를 되풀이해야 했다. 동시에 관현악단과 합창단원이 반대 편에서 내게 가장 열렬한 갈채를 보내 주었다.”
 영국에서의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아홉 번이나 초청을 받아 영국을 방문하면서 교향곡 8번, 레퀴엠 등을 영국으로부터 위촉받아 작곡하였다. 영국에서의 성공적 연주와 명성으로 마침내 영국의 전통을 자랑하는 캠브리지대학으로부터 명예 음악박사 학위까지 받게 된다. 한편 영국으로의 잦은 연주여행은 그의 창작에 큰 자극을 주었고 작곡가로서의 전성기를 맞은 그는 국제적으로도 대 작곡가의 그룹에 들게 되고 아울러 막대한 수입을 가져 오게 된다.
 잦은 해외 여행이 계속됐으나 드보르작은 언제나 보헤미아 남부의 우스크라 지방에 생활의 보금자리를 좋아했으며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비둘기를 기르며 아침 저녁으로 숲과 벌판을 거닐며 농부와 광부들과 소박한 이야기를 나누는 전원생활을 즐겼다. 인간도 자연도 모두 따뜻하고 부드러운 환경 속에서 2남 4녀를 거느리게 된 드보르작은 차이콥스키가 ‘순진하고 착한 여인’이라고 칭찬한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행복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며 그의 최대 걸작중의 하나인 교향곡 4번 op.13은 이러한 행복함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드보르작의 명성이 높아가면서 그의 주위엔 유명 음악가들이 모여 들었고 이내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 초빙을 받아 모교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유럽 전역에 드보르작의 이름이 유명해질 때인 1892년 신천지 미국으로부터 뉴욕 국민음악원 원장으로 초빙을 받는다. 그리고 드보르작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 3백명의 합창단과 80명의 관현악단이 성대하게 그를 맞이해 주는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1895년 봄까지 음악원 원장을 맡고 있던 동안 미국의 주목할 만한 작곡가들을 그의 문하에서 길러내는가 하면 그의 최후의 교향곡이자 최대의 명작인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From the New World」op.95와 현악4중주 제12번 F장조 일명 「아메리카/America」, 그리고 첼로협주곡 b단조 op.104등을 작곡한다.
 드보르작의 미국생활은 검소하였으며 가족 중심의 단란한 생활 외에는 사교계의 출입은 물론이요, 음악회조차도 잘 가지 않을 정도였다. 드보르작은 복잡하고 현란한 뉴욕의 거리가 아닌 조용한 자연이 그리워 항상 향수에 젖어 있었다. 교향이 그리울 때는 뉴욕의 항구에 나가 정박한 원양선을 보며 향수를 달랬고 자연이 그리워질 때면 센트럴파크에 가서 산책을 하곤 하였다. 1893년 작곡한 신세계교향곡도 이처럼 누를 길 없는 향수, 거대한 뉴욕의 거리와 부두, 활력에 넘치는 신대륙의 강한 인상, 광활한 대지, 그리고 아름다운 신대륙의 대자연으로부터의 느낌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 교향곡의 대부분은 보헤미아의 이민족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고 있는 아이오와주의 스피리빌의 피서지에서 쓰여졌다.
 드보르작은 같은 언어로 자유롭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체코의 이민부락인 스피르빌에서 매우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미국에까지 초청받아와 그것도 자기네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보헤미안들의 보살핌과 애정은 극진하였던 것으로 드보르작은 뉴욕으로 돌아온 후 스피르빌에서의 여름 동안의 생활을 고국에 이렇게 전해 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끊임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를 좋아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들은 내가 체코의 전통적인 종교음악을 연주해 주면 기뻐했습니다.”
 향수 속에 2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아름다운 자연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언 50을 넘어선 나이로 작곡가로서는 원숙기에 접어든 때였다. 귀국 다음 해인 1896년 에르벤의 민속시를 표제로 한 「물의 정령/Vodnik」op.107을 비롯 3편의 교향시를 작곡한다.
 한편 그는 평생을 두고 은근히 야심을 품은 체코의 베르디가 되는 꿈의 실현을 위해 오페라 작곡에 착수한다. 물론 이전에도 이미 몇 편의 오페라를 완성하였지만 1900년에 야심의 오페라 「루살카/Rusalka」op.114를 발표함으로써 오페라 작곡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둔다. 물의 요정과 인간과의 비련을 그린 오페라 「루살카」는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와 더불어 체코 오페라의 금자탑을 이루는 역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체코의 베르디가 되어 오페라계를 정복해 보겠다는 그의 오페라는 극적 구성력이 부족하여 결국 베르디처럼 오페라로 세계적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어느새 그의 나이 60세로 접어 들면서 왕성했던 창작력이 하강선을 그리고 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창작 의욕만은 대단하여 60세를 전후해 완성을 본 작품으로는 교향시 「영웅의 노래/Pisen Bohatyrska」op.111이 있으며 최후의 작품으로 1902년에서 1903년에 걸쳐 작곡한 환상적 오페라 「아르미다/Armida」op.115는 바그너의 아류의 것으로 그리 환영을 받지 못하고 만다. 1901년 60회 생일을 맞아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으며 프라하 음악원의 예술학원장에 선임된다. 그러나 60이 되도록 병이라고는 모르고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던 드보르작에게 뜻하지 않게 병이 생기게 된다. 생의 노년기에 찾아온 영광도 잠시뿐 신장병과 방광염의 중병으로 병마와 싸우는 투병생활을 하다가 1904년 5월 1일 뇌일혈로 6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으며 체코 국민의 슬픔은 대단하였고 장엄한 장례는 드보르작 자신의 진혼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엄수되었다.
 
 
2. 드보르작의 작품세계
 보헤미아 최대의 작곡가이면서 민족주의 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드보르작은 슈베르트처럼 음악적 천분을 타고난 개성이 강한 작곡가이다. 더욱이 아름답고 재능있으며 현명하기까지 한 부인을 만나 안락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훌륭한 작곡가로서 많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라 하겠다. 그는 완성곡만도 206편에 이르는 바, 작곡의 모든 분야에 걸쳐 고르게 작품을 남겼다.
 그의 오페라는 그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고픈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모짜르트, 베르디, 푸치니 등의 오페라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는데 이것은 극적 구성력의 부족에서 온 것임을 후세의 평론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오페라 중 60세를 바라보며 완성한 「루살카」만은 오늘날까지도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자주 상연되고 있다.
 드보르작은 절대음악 분야인 교향곡과 실내악 분야에서는 확실한 성공을 거둔 작곡가이다. 총 9곡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제8번 G장조, 제9번 e단조(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작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5편의 교향시와 다악장 형식으로 된 현악 4중주곡을 비롯해 32곡의 실내악곡을 남긴 바 19세기 후반에 브람스에서 이어지는 실내악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관현악 작품만도 「슬라브 춤곡집/Slovansketance」제1집 op.46과 제2집 op.72 등을 비롯해 20여편에 가까운 곡을 남기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는 피아노 협주곡 g단조 op.33, 바이올린협주곡 a단조 op.53, 그리고 미국에 있을 때 작곡한 유명한 첼로협주곡 b단조 op.104를 비롯해 모두 7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피아노 곡으로는 연탄곡 스코틀랜드춤곡집 op.41과 보헤미아의 숲에서 op.68과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8 Humoresky」op.101을 비롯해 10여편의 곡을 남기고 있다.
 성악곡 분야는 라틴어 전례문에 의해 작곡된 교회음악 「스타바트마테르」op.58, 미사곡 op.86, 레퀴엠 op.89, 테 데움 op.103 등이 있고 그의 출세작의 하나인 「빌라 호라의 후계자들」을 비롯해 많은 합창곡과 무반주 합창곡 등이 있으며 2중창곡인 모라바 이중장 op.26을 비롯 많은 이중창곡을 남겼고, 유명한 「집시의 노래/Gypsy Melodies」op.55, 「황혼의 노래/Evening Songs」op.3등 수십 편의 예술성 높은 가곡을 남겼다.
 드보르작의 초기 작품에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향이, 그리고 차츰 바그너와 스메타나의 영향이 보이나 끝까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작곡가는 바그너라 할 수 있겠다. 브람스로부터는 음악 전체의 구성과 주제 전개법을, 바그너로부터는 참신한 화성법을 영향 받았으며, 그 위에 체코 특유의 민속음악 어법을 가미하여 보헤미아 음악이 국제무대로 진출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체득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박한 민요의 선율과 보헤미아적인 어법의 복합사용으로 이국적이고도 변화감이 풍부한 곡을 썼으며 이로써 국민주의적 음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민요의 쓰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다. “작곡가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의 민요정신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것은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민요의 선율을 그대로 통째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을 곡에 반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