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Puccini(푸치니) Opera - Manon Lescaut(마농 레스코) - [Intermezzo(간주곡)]

black silk 2011. 10. 18. 06:00

 

 

 

 

Puccini(푸치니) Opera - Manon Lescaut(마농 레스코) - [Intermezzo(간주곡)] 05:13

Conduct : Marcello Rota

 

 

 

마농 레스코
 

'푸치니의 세 번째 오페라', '푸치니 최초의 성공작', 푸치니가 대본의 줄거리를 직접 선택한 최초의 오페라'. 이것은 프레보(Prevost)의 동명 소설(1731)을 오페라화한 푸치니의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가리키는 말이다.
프레보(1697 - 1763)은 예수회와 베네딕트회의 수도승이었는데, <어느 귀족의 추억과 모험>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후 수도원을 나와 영국과 네덜란드를 방랑했다. <마농 레스코>의 원작에 해당하는 <기사 데 그뤼와 마농 레스코의 진실한 이야기>는 <어느 귀족의 추억과 모험>의 제 7편으로 1731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마스네의 <마농>(1884)과 <마농의 초상>(1894), 오이베르의 <마농>(1856), 클렝미셀의 <마농>(1887), 한스 베르너 헨체의 <고독의 거리>(1952) 등도 같은 원작을 오페라화한 작품들이다. 알레비의 3막짜리 발레음악 <마농 레스코>(1830)도 있다.

푸치니는 마스네의 <마농>이 국제적으로 성공하게 되자, 프레보의 원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소설을 읽는 가운데 줄거리나 등장인물, 전체적인 분위기가 자신의 취향에 맞다고 생각했다. 푸치니를 가르켜 종종 '이탈리아의 마스네'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두 음악가의 공통점은 세련되고 나른한 에로티시즘, 인간의 불행을 묘사하는 섬세한 감각을 소유했다는데에 있다. <마농 레스코>에 대해서 푸치니는 이렇게 말했다.

 "마스네는 프랑스식으로 화장 냄새가 진동하고 미뉴에트 일색인 것으로 느꼈지만, 나는 이탈리아식으로 처참한 열정으로 느꼈다."

마스네의 <마농>에 비해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가 원작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마농이 죽은 곳도 마스네의 작품에서는 르 아브르의 길거리로 바뀌었으며 원작에 없는 장면이 삽입되기도 했다. 이 오페라의 시대적 배경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와 미국이다.


베르디와 바그너의 계승자임을 입증한 작품


제1막: 아미엥의 광장. 에드몬드(테너)가 동료학생들에게 장난기 섞인 목동의 노래 '아름다운 밤이 온다'를 부른다. 데 그뤼(테너)가 등장하자 에드몬드가 함께 어울려 사랑의 모험을 해보자고 유혹하지만 이를 외면한다. 마농의 오빠 레스코(바리톤), 제롱트(베이스), 마농(소프라노)이 마차에서 내린다. 데 그뤼는 마농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 레스코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농에게 말을 건넨다. 마농은 지금 수도원에 가는 중이다. 마농은 데 그뤼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이때 데 그뤼 가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가 Donna non vidi mai (일찌기 보지못한 미인)이다 제롱트는 레스코에게 넌저시 그가 마농에게 마음이 있음을 밝히지만, 레스코는 카드 놀이에 정신이 없다. 에드몬드는 여관주인에게 마차를 부탁하여 마농을 납치하려는 제롱트의 계략을 눈치채고 이를 데 그뤼에게 말해준다. 에드몬드의 도움으로 데 그뤼와 마농은 준비해 둔 마차로 한발 앞서 도망간다. 제롱트와 레스코는 파리에서 마농을 찾아보기로 한다.

 

제2막: 파리에 있는 제롱트의 저택. 저녁 파티에 나갈 화장을 하고 있는 마농. 그녀는 데 그뤼와 함께 살았던 허름한 아파트 생활을 잊지 못하고 있다. 제롱트가 무도회에 먼저 떠난 다음, 데 그뤼가 찾아온다. 마농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던 데 그뤼도, 용서를 빌면서 사랑을 호소하는 마농을 품에 안는다. 이 때 제롱트가 들어오는데, 마농은 거울을 집어 들고 제롱트에게 들이 대면서 늙고 흉한 얼굴을 조소한다. 화를 억누르면서 제롱트가 나가자 데 그뤼는 빨리 도망하자고 말한다.
남겨둔 재산과 보석에 미련이 남아 있는 마농을 보고 생각을 고쳐 먹으라고 호소한다. 마농이 도망가기 전 보석을 챙기려는 마음에 늑장을 부리자, 경찰이 들어와서 마농을 체포한다. 공공장소에서의 매춘과 도둑질이라는 죄명이었다.


제3막: 감옥에 가게된 처지를 뉘우치는 내용과 다가올 험난한 비운을 예고 하듯 Intermezzo(간주곡)가 흐른다 간주곡이 끝난 다음 르 아브르 항구의 부둣가. 마농은 다른 여자 죄수들과 함께 임시 감옥에서 아메리카 행 배를 기다리고 있다. 먼동이 트기 전에 데 그뤼와 레스코는 감옥 근처에 숨어 마농을 구출하려고 한다. 레스코가 마농을 구해 내려고 하자, 데 그뤼는 감옥 창살을 통해 마농과 대화를 나눈다. 갑자기 호각소리가 나더니 레스코가 뛰어와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도망가자고 말한다. 중사(베이스)는 북을 울리게 하고 죄수들을 점호하여 배에 실으려고 한다. 마농이 나타나자 데 그뤼는 그 곁을 지나간다. 마농은 자기를 잊어달라고 애원하지만, 데 그뤼는 중사에게 매달려 반항하다가 그에게 뱃사람으로 아메리카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데 그뤼의 눈물 겨운 간청에 감동을 받아 선장(바리톤)이 승선을 허가한다.

 

제4막: 뉴올리언즈 근방의 황량한 벌판. 도망나온 마농과 데 그뤼가 남루한 차림으로 등장한다. 마농은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데 그뤼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자 기절했던 마농이 의식을 되찾아 목이 마르다고 말한다. 데 그뤼는 물을 찾아 멀리까지 가보았지만 허사였다고 말하면서 빈손으로 돌아온다. 함께 죽고 싶다는 데 그뤼를 타이르면서 마농은 마지막 키스를 나눈 후 서서히 죽어가고, 데 그뤼는 시체에 엎드려 통곡한다.


 

마스네의 작품과 정면 대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같은 장면을 피하고 가능한 색다른 것을 만들려고 지나치게 애썼기 때문에 대본에 많은 약점이 노출되고 있다. 극적인 의미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1막에서 마농과 데 그뤼가 손을 잡고 함께 도망쳤는데, 제2막에서는 마농이 제롱트 노인의 정부가 되어있다.
제4막에서도 두 사람이 왜 벌판을 헤매이고 다니는지 그 이유가 분명치 않다. 원작을 읽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는 마스네의 <마농>에 비해 극적인 효과는 한층 떨어지지만 음악적인 흥미는 한층 높다. 화려한 색채의 관현악 편곡과 오페라 전체를 통해 넘쳐 흐르는 멜로디와 합창은 대본의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베르디와 바그너의 계승자임을 입증하고 있다.

서곡이나 전주곡이 따로 없으며, 밝고 화려한 분위기의 빠른 서주로 막이 오른다. 제2막에 나오는 마드리갈은 1880년에 작곡한 미사 중의 <신의 어린 양>에서 따온 것이며, 제2막에서의 제롱트와 마농이 추는 미뉴에트는 당시에 그가 작곡했던 현악4중주를 위한 2개의 미뉴에트에서 따온 것이다. 제3막에서 나오는 형무소 창문에서의 마농과 데 그뤼 간의 장면이라든가 마지막 사형장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은 1890년 1월 18일 아마데오다오스타 대공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했던 비가 <국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농 레스코>는 1893년 2월 1일(수요일) 토리노의 레지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체시라 페라니(Cesira Ferrani: 마농 역), 주세페 크레모니니(Giuseppe Cremonini: 데 그뤼 역), 모로(Moro), 알렉산드로 포메(Alessandro Pome: 지휘) 등이 출연했다. 프리마 돈나 페라니는 <라 보엠> 초연 때에도 미미 역을 맡게 된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인 <팔스타프>의 스칼라 극장 초연이 있기 8일 전이었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온다는 것은 이를두고 말함인가. 베르디의 시대는 가고 푸치니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애초에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기를 희망했던 푸치니의 생각과는 달리, 초연 장소가 토리노로 결정된 것은, 얼마 전에 스칼라 극장에서의 푸치니의 작품 <에드가>가 실패한 것을 염려한 데다, 당시 스칼라 극장이 초연을 8일 남겨둔 베르디의 <팔스타프> 공연 준비로 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염려와는 정반대로 초연 당시 입장권은 매진되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평론가들이 토리노에 연이어 도착했다. <마농 레스코>의 성공으로 푸치니는 당시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세명의 작곡가 , 즉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890)의 마스카니, <팔리아치>(1892)의 레온카발로, <크리스토프 콜롬보>(1892)의 프란체티를 훨씬 능가하는 일약 국제적 명성의 작곡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오데자네이루, 상트 페테르부르크, 뮌휀, 함부르크 등지에서 상연되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십자가 기사단 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밀라노 음악원장인 바치니로부터 작곡 교수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베니스 시에서는 베네데토 마르첼로 리체오의 교장으로 와달라고 초청했다.
1894년 5월 14일 런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올기나, 베두시, 피니-코르시, 세필리(지휘) 등이 출연하여 공연했다. 푸치니도 이 런던 초연에 참석했다. 당시 <더 월드>지에 기고하던 젊은 평론가 버나드 쇼는 이 작품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가 쓴 공연평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내가 보기에 푸치니는 다른 어떤 경쟁자들 보다 베르디의 후계자로 적합하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다시 부활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러나 버나드 쇼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마농 레스코>의 런던 초연은 적자를 면치 못했으며, 이 때문에 코벤트 가든 측에서는 3년 후 <라 보엠>의 영국 초연을 예약하려던 푸치니 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토스카니니의 편곡으로 더욱 빛을 발한 <마농 레스코>


미국 초연은 1894년 8월 29일 필라델피아에 순회 공연 중이던 이탈리아의 한 오페라단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1907년 1월 18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초연 이후부터 미국인들로부터 사랑받는 레퍼토리로 정착했다. 뉴욕 초연에서 엔리코 카루소, 리나 카발리에리, 스코티 등이 출연했다.
1910년의 파리 초연을 이끈 것도 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이었다. 당시 푸치니도 공연장에 참석했으며, 마농 역을 맡은 보리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 빈 초연은 1908년에 이루어졌지만, 1923년에 가서야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1922년 12월 25일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스칼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갈라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이때 토스카니니는 몇 군데 관현악 편곡을 가볍게 처리하여 악기군 간의 균형을 가져왔으며, 출연 가수들의 노래가 좀더 잘 들리도록 했다. 오늘날에 공연되고 있는 <마농 레스코>는 토스카니니의 편곡으로 굳어져 있다. 이날 공연에서 푸치니 자신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써 토스카니니와 푸치니 사이에 남아 있던 감정의 앙금도 말끔히 가시게 되었다. 이튿날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에게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심심한 감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빈 국립 오페라단에서도 '푸치니 페스티발'의 일환으로 <마농 레스코> 초연 30주년을 기념하여 그해 5월에 특별공연을 가졌다. 당시 로테 레만과 알프레드 피카베르가 주역을 맡았다. 그러나 테너 가수가 갑자기 병석에 드러눕게 되어 공연이 몇 차례 연기되었고, 10월 5일에 가서야 무대에 올려졌다. 푸치니는 아들과 친구와 함께 빈에 가서 새로 구입한 란치아 승용차를 타고 빈 시내를 누볐다. 그가 마치 빈의 황제가 된 기분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10월 공연 때에도 푸치니는 빈을 방문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마농 레스코>가 제작되어 상연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던 푸치니. 그리하여 30년 동안 계속적인 수정이 가해진 오페라. 이것은 오페라 역사상 매우 드문 진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