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 앤더슨 (Marian Anderson, 1897~1993)
흑인이었지만 역사상 최고 알토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는 앤더슨은 필라델피아에서
가난한 흑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처음엔 가난 때문에, 나중에는
피부색 때문에 평생 단 한번도 음악학교를 다닐 수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비범한 목소리로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
그녀는 교회의 성가대에 들어가서 노래를 배웠으며, 그녀의 재능 때문에 교회사람들이
돈을 모아 그녀가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28세 때 있었던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자 공개모집이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300여명의 지원자 가운데서 단 한 명으로 뽑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저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녀였지만,
그때부터 그녀의 행로는 승승장구가 아니라 인종차별과 싸우는 가시밭길의 연속이 었다.
대표적인 일화로 그녀는 워싱턴의 컨스티튜션 홀에서
이틀을 하기로 하였는데, 흑인이란 이유로 연주장 측으로부터 취소를 통고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처사에 대한 항의로 링컨기념관 광장에서 연주를 강행하였고,
그녀에 대한 지지로 그날 무려 7만 5천명의 청중이 운집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그녀는 연주여행 도중 스케줄이 잡힌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당하기도 하였고,
받아주는 식당을 찾지 못해 식사를 거르고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한 사람을 위한 연주, 하지만 항상 사람들을 돕고 웃음을 잃지 않은 그녀는 어디서나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연주여행에서 만난 한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그녀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을 하며 앤더슨이 학생에게 “오늘 저녁 음악회에는 오실 거죠?”라고
물었더니, 학생은 돈이 없어 못간다고 대답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베 마리아'를
불러주었다. 그녀는 항상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크게 성공한 말년에 기자가 그녀에게 “당신의 인생 중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나?”고 물었다.
이에 앤더슨은 “어머니에게 이제 더 이상 남의 집빨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라고 대답했다. 1953년 전쟁 때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부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한 연주회장을 찾기 어려웠음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에 앤더슨은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 피난민들을 위해 노래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다.
백년에 한번 나올 만한 목소리라고 극찬했던 대지휘자 토스카니니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간판곡목인 '깊은 강' 등의 흑인영가를 부르는 그녀의 음성은 인생에 지친
우리들을 위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상 최초의 흑인 오페라 주역, 하지만 보수적인 오페라하우스는 아직도 흑인에게는
미답의 경지였으며,1955년 그녀는 드디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 출연함으로써,
흑인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오페라의 프리마돈나가 되었다.그녀가 맡은 배역은 가면
무도회 중의 울리카라는 단 한 장면만 나오는 배역으로서, 출연도 단 5회로 끝났다.
그녀의 나이 이미 53세 때의 일로 계속 오페라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 큰 발자취 덕분에 그 후 세계 오페라하우스에서는 그녀를 잇는
흑인 프리마돈나들의 도도한 물결이 시작된 것이다.
글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 글쓴이 : 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