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엄정행 - 희망의 나라로(현재명 작사&작곡)

black silk 2018. 4. 20. 08:00

 

 

 

 

 

 

 

 

엄정행 선생의 많은 노래를 올렸지만 우리 가곡희망의 나라로 빠저 있고

4계절의 시작인 봄에도 맞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은 좋은 것이라서

사연과 유서 깊은 이 가곡에 관한  주변 이야기를 같이 올린다

 

 

 

 

엄정행 - 희망의 나라로(현재명 작사&작곡)

 

희망의 나라로 - 현제명 작시, 현제명 작곡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 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곳 희망의 나라로

 

밤은 지나가고 환한 새벽온다 종을 크게 울려라

멀리 보이나니 푸른 들이로다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곳 희망의 나라로

 

 

 

 

 

 

현제명 작사 작곡의 - 희망의 나라로


<희망의 나라로>를 꿈꾸던 일본 압제하의 조선 민족

현제명은 홍난파와 함께 초창기 한국가곡의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작곡가다. 그런데 두 분은 작곡가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홍난파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현제명은 성악가로서 테너였다. 초창기 한국 음악계에는 처음부터 작곡을 전공한 이가 드물었다.

두 사람의 노래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홍난파의 가곡이 애상조인데 반해 현제명의 가곡은 밝고 경쾌하고 힘찬 선율이 특징이다.

1940년에 지어진 <희망의 나라로>는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불릴 정도로 미래지향적인 경쾌하고 힘있는 노래이다.

 

그런데 <희망의 나라로>와 관련해 늘 의문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작곡된 노래라고 하지만, 과연 그 시절에 <희망의 나라로>라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만약에 부를 수 있었다면, 여기서 말하는 ‘희망의 나라’는 과연 어디란 말인가?

그러던 중 <희망의 나라로>가 일제 때 불려졌다는 사실은 작곡가 나운영 (1922~1993) 선생이 남긴 수상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나운영 선생은 그의 제3수상집 <스타일과 아이디어>(1975)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일제말기, (현제명) 선생이 독창을 하는 날에는 마스크를 쓰고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서 무대 뒤를 조용히 걸어다니다가 <니나> 또는 <희망의 나라로> <고향생각> 등을 감명깊게 노래하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즉 노래하기 전에 목을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점과, 노래하기 전에 정신을 통일시킨다는 점 등, 그 마음 자세를 우리는 본받아야 할 줄로 생각한다. 성악가가 연주 직전에 이야기를 많이 해서는 절대로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무언 중에 가르쳐 주는 귀중한 예라고 생각된다."(이 책 98쪽)

현제명이 무대 위에 서기전에 얼마나 목관리에 신경을 썼는지를 말해주는 대목 속에서 <희망의 나라로>를 레퍼토리로 불렀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분위기는 그가 작곡집 1집에 실은 <조선의 노래>를 생각나게 한다.

<조선의 노래>는 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가곡부문에 당선된 노래로서 이은상 시에 현제명이 곡을 붙인 것이다.

금 50대 이상 된 분들은 어린 시절 자주 들었던 이 노래를 모르는 이가 없다.

 

조선의 노래(후에 ‘대한의 노래’로 제목이 바뀜)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사는 우리 삼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삼천리 아름다운 이 내강산에

억만년 이어나갈 배달의 자손

길러 준 힘과 재주 모두 합하니

우리들의 앞 길은 탄탄하도다

 

보아라 이 강산에 날이 새나니

삼천만 너도나도 함께 나가자

광명한 아침해가 솟아오르니

빛나도다 그 이름 조선이로세

 

당시 현제명이 이 노래를 동아일보에 응모할 때는 작사자를 미상이라고 했단다. 후에 이은상으로 밝혀졌지만.

그러나 이 노래는 가사 때문에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고 현제명은 재직중이던 연희전문학교(영어 강사 겸 음악부 주임)를 떠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의 노래>는 일시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작곡가 최영섭 선생(1929~ )의 증언에 따르면, “8.15해방 후 불과 2~3일 지나면서부터 서울 시내에서 이 노래가 불려지는 것을 보고 ‘아!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부르지 못하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고했다.

 

<조선의 노래> 멜로디에 <애국가> 부르기도

최영섭 선생과 비슷한 증언을 인테넷에서 찾아냈다. 운호(雲豪) 정백영(鄭佰泳) 이라고 이름을 올리신 분의 다음과 같은 글이다.

 

“노산 이은상이 지은 <조선의 노래>는 1930년대 초반 동아일보사에 발표된 것으로 현제명이 작곡하였는데 당시의 청년들은 이것을 국가를 부르는 심정으로 불렀다.

(이어 그 아래에 <조선의 노래> 가사와 <애국가> 가사를 함께 올려놓았는데, 애국가 가사를 같이 올려놓은 이유는 이 노래의 멜로디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불렀다는 설명을 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우리들 세대는 우리말도 잃었다가 8.15 광복 후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우리말로 처음 배운 노래가 <조선의 노래>이기에 감명 깊습니다.

맹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함께 모여 서서 배웠지요.

이 노래는 이별의 곡으로 불렀고, 그 다음 애국가 가사도 같은 곡으로 잠시 부르다

안익태 선생님의 <코리아 판타지>에서 애국가 곡이 확정되어 오늘의 애국가가 되었다 고 기억됩니다.

그 당시 “복되라”는 “복되도다”로, “조선이로세”는 “조선이라네”로 고쳐 배웠고 “조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그 시절부터 조국의 통일을 바라고 빌어 왔건만 기막히는 6.25 민족상잔을 겪고 보리고개 넘으며 홍안소년이 백발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오늘도 통일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잠 못 이루는 밤 염원 속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이 글 가운데 “이 노래는 이별의 곡으로 불렀고, 그 다음 애국가 가사도 같은 곡으로 잠시 부르다--”라고한 대목이 잘 이해되지 않다. <조선의 노래>를 이별의 노래로도 불렀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전체 맥락으로 보아 혹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현재의 우리 <애국가>의 가사를 1910년 한일강제합병 전후에 이별의 노래인 아일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멜로디에 붙여 부른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해방 직후에는 가사를 <올드 랭 사인> 대신 <조선의 노래>멜로디에 붙여 부르다가 오늘날 <애국가>로 발전했다는 뜻은 아닐까 생각하였다.

 

위의 글은 2008년 12월 16일에 인터넷에 올려진 것으로, 후세를 위해 이러한 기록을 남겨주신 정백영 선생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현제명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으로 후일 친일 음악가 명단에 올라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조선의 노래>나 <희망의 나라로>를 작사, 작곡할 때에는 일제식민지하의 서글프고 억압된 환경속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자 이 노래를 지었을 것이라고 최영섭 작곡가는 추측한다. 현제명, 그 역시 민족과 친일 사이에서 방황하던 예술인이었다

 

해설자 이정식 (서울문화사 사장)

기사출처 세종경제신문